살아남아라! 학생회! 1부 위기의 학생회

Epilogue 서른의 잔치는 끝나도 스물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1990년대를 풍미했던 시 중에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1980년대 당시 20대를 치열한 학생운동과 함께 보냈던 이들이 10여 년이 지나 서른 살이 되어 술자리에서 다시 만난 상황을 노래한 시입니다. 시 안에 그려진 풍경은 자못 씁쓸합니다. 국가의 억압에 맞서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던 이들은 이제는 30대가 되어 사회에 적응하고 현실에 자신을 밀어 넣으면서 굴절된 지 오래입니다. 시인은 이런 쓸쓸한 광경을 바라보며 고백합니다. 치열한 투쟁의 시기에 사랑했던 것은 운동 그 자체보다는 운동이 만들어낸 분위기, 사람들, 그 시대적 동질감이었다고 말입니다. 80년대가 주던 시대적 동질감은 90년대와 함께 퇴조하고 있었고 이제 운동도, 잔치도 끝나고 그 시절을 눈물 흘리며 회상하는 것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슬프고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시인의 자조어린 읊조림이 이러한 멜랑콜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1990년대를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의 감정에 울림을 주었기 때문일까요. 이 시를 포함한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년 베스트셀러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


  그러나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80년대 학번을 살아갔던 이들이 운동을, 잔치를 끝마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면 그 무엇도 시작해보지 못한 오늘날의 20대에게는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긴 전쟁만이 있을 뿐입니다. 199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노동유연화에 따른 양질의 일자리와 사회보장 축소, 2000년대를 지나며 완전히 세가 꺾인 경제성장 등의 이유로 오늘날 20대는 생존을 위해 더 치열한 경쟁을 감내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다양한 스펙들을 갖춰야 한다는 담론이 떠올랐습니다. 학벌부터 성형까지 7종 스펙이니 9종 스펙이니 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모든 스펙들을 관리해도 취직이 되지 않자 이번에는 무언가를 갖추는문제가 아니라 포기하는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결혼, 출산, 육아, 연애 등 갖춰야 할 것들의 리스트만큼이나 포기할 것들의 리스트가 길어지면서 N포세대란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점점 강해지는 경쟁은 비단 20대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닙니다. 모든 세대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일상화된 불안이죠. 그러나 운동 혹은 잔치를 끝낼 수 있었던 세대들과 운동은 경험조차 해보지 못한 세대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1980년대 운동(잔치)의 시기에는 탄압과 고통으로 힘들었어도 함께 이뤄야 할 시대적 사명이 있기에, 동지가 있기에 강력한 버팀목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경제적 호황기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잔치를 끝낼 수 있는 출구가 보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잔치를 끝마치고 났을 때, 그곳에는 아쉬움뿐만 아니라 매력이, 현실의 씁쓸함을 보충하는 낭만적인 회고가 뒤섞인 멜랑콜리가 남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N포세대는 그 어떤 잔치도 제대로 시작해본 적이 없습니다. 2012년 등록금 투쟁이 좌절됐을 때 청년 세대의 정치적 욕망은 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야 했습니다. 이따금씩 2013안녕들하십니까대자보 열풍처럼 억눌렸던 정치적 요구가 분출된 적은 있지만 그것이 유의미한 사회적 의제로 설정된 적은 많지 않았습니다. 결국 잔치의 출구는 고사하고 입구조차 찾을 수 없으며 함께할 정치적 동지는 고사하고 고통을 함께 나눌 친구나 애인조차 만들기 힘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의 대학생들, 젊은이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멜랑콜리에서 매력과 낭만적인 회고를 빼버리고 남은 것, 즉 일상화된 우울·무기력·냉소뿐입니다.

 

잔치가 아닌, 유예할 수 없는 나의 삶을 위해

  과거의 운동은 거대한 차원에서의 변화를 위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삶을 유예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유예된 삶의 고통을 보충해주는 부분들이 다름 아닌 시대적인 동질감, 동지들, 분위기들에 대한 낭만화였습니다. 그것들이 모여서 이루는 낭만화된 운동의 상()이 곧 잔치입니다. 그러나 잔치는 끝났습니다. 오늘날에는 오래된 낭만은 깨어지고 자신의 삶을 미뤄두더라도 그 삶이 이후에 안정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학생회를 더 이상 유지시킬 수 없는 이유입니다. 잔치가 끝났으니 이제 남은 것은 날 것 그대로의 경쟁에 던져진 삶뿐입니다. 각자도생의 전쟁을 치르기에 여념이 없으니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니 정치가 발생할 수 없고, 정치가 존재하지 않으니 정치를 위한 기구들이 사라집니다.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고, 학생회를 견제할 학생들이 없으니 학생자치기구들이 부패하고, 신뢰는 깨지고 제대로 되는 사업은 사라집니다. ‘위기의 학생회에는 이처럼 잔치가 끝났다는 시대적 조건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잔치가 끝난 이후에 우리들은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삶을 유예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대학은 점점 개별 구성원들의 삶이 펼쳐지는 현장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학이 만약 삶이 펼쳐지는 현장으로 인식된다면 사람들은 그 현장 안에 머무르면서 그곳을 바꾸고자 노력하고 힘과 지혜를 모으겠죠. 그러나 대학이 현장이 아니라 그저 4년만 지나면 뒤돌아볼 새도 없이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정류장에 불과하다면 누구도 곧 떠나버릴 공간을 위해 자신의 노고를 들이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돌이켜 생각해봅시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만 들어가면 이제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공부했는데, 막상 대학에 들어오고 나니 이제는 취업만을 바라보며 삶을 유예합니다. 그런데 취업을 하면 우리의 유예된 삶이 돌아올까요? 아니죠. 그때부터는 승진과 봉급을 올리기 위한 경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요? 시시각각 좁혀 들어오는 정년의 위협과 노후대책을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경쟁의 순환 속에서 유예된 삶이 돌아오는 순간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속한 공간 안에서, 그 공간을 현장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내려는 정치적 행위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유예해도 돌아오는 것은 쉼 없는 경쟁과 자기통제뿐이라면 그 짐들을 내려놓고 내 삶을 억압하고 있는 조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에서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에서의 삶을 더 이상 유예할 수 없기에 우리는 학생회를 만들고 정치와 운동을 복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학생회에게 살아남아라!”라고 외쳐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의 운동은 두 가지의 유예로부터 벗어나 우리들의 삶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첫 번째 유예는 과거의 운동이 답습했던 유예입니다.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니 당장의 삶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에 호소하는 것이죠. 그러나 역사적 사명감이라는 낭만화 기제를 빼내버리고 나면 그것을 유지시켜줄 동력은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체 사회의 변화와 우리들의 삶이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주는 설득력 있는 연결고리가 없다면 그 누구도 그 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 유예는 이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유예입니다. 그런 거대한 사회적 변화 같은 것은 아무짝에도 의미가 없는 허구일 뿐이니 당장의 경쟁에나 집중하라는 지배질서의 정언명령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따른다고 해도 거기에는 불안한 삶의 굴레만이 이어질 뿐입니다. 결국 그 두 가지 유예 모두로부터 벗어난 운동·정치를 복원할 때 학생회가 비로소 학생사회 안에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학생회는 대중추수주의나 조합주의로 빠져서 지엽적인 문제들만을 처리하다가 서비스업체로 전락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엘리트주의에 빠져서 당장의 현실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그 현실에 고통 받는 이들을 단순히 동원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제자리에 머물러서도 안 되지만 멀리 가자고 말만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분투하되 멀리 가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유예할 수 없는 삶에 말을 거는 올바른 방식이자 곧 대중운동이 형성되고 움직이는 방향이 아닐까요? 결국 오늘날 학생회를 하는 우리 모두에게 간절한 것은 학우들의 더는 유예할 수 없는 삶에 말을 거는 방법에 대한 고민과 실천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디로?

 안타깝게도 그 답을 대학연구네트워크가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희는 그러한 고민을 더 치열하게 해보고자 합니다. 살아남아라! 학생회!1부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위기의 징후들을 스케치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학생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부분들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현상 차원에서의 간단한 제도적 해결책을 제안해보는 것이었죠. 그러나 앞으로 대학연구네트워크는 살아남아라! 학생회!2부를 준비하면서 더 깊이 있는 내용들을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대학이란 무엇인지, 과거 학생운동의 지평 안에서 대학담론은 어떠했는지 등을 묻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것들을 계승하고 어떤 것들을 비판하고 기각할지를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조만간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1부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추후에 공개 세미나로 돌아올 예정이니 학생회에, 학생운동에 아직 관심이 남아있는 분들이라면 그 세미나에서 뵐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y 미미

살아남아라! 학생회! 1부 위기의 학생회

Ep.8 열정페이, 극복할 수는 없는 걸까?



  지금까지의 글에서 전술했듯 학생회는 위기상황수 년째 위기상황이라고 말을 하지만에 봉착해있다. 그 이유는 과거와 달리 숙련되고 정제된 인력이 부족하며 예산 역시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력부족과 예산부족, 이 두 가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 이상 학생회가 학생활동가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 비해 (학생정치의 침체로 인해) 학생회 활동은 더 힘들어진 반면 학생회 활동이 제공해주는 메리트는 딱히 없는 상황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학생회 활동은 디메리트가 될 우려마저 있다. 오늘날 취업요건은 훨씬 강화되었으며 학생회활동은 기업에서 그다지 반기지 않는 활동이력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이렇듯 메리트는 적으면서 학생활동가들에게 노동에 뒤따르는 적절한 보상조차 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야, 너희 장학금 받잖아

 

장학금은 '임금'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대다수의 학생회는 약소하나마 보상을 제공하기는 한다. 정말 약소해서 문제일 뿐이다. 가장 주된 보상책은 장학금 지급이다. 학생회 임원진에 대해 공로장학금의 명목으로 등록금을 감면해준다거나 혹은 근로장학금 TO를 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지급 주체가 학생회가 아닌 학교라는 점이다. 우선 사실상 활동가들의 노동을 통제하고 그 효과를 보는 사용자는 학생회다. 그런데 현재의 학생회 장학금 제도는 사용자인 학생회가 지급해야 할 급여/비용의 책임을 학교 당국에 전가하는 문제가 있으며사실상 제대로 된 보상이 아님을 의미한다― 법적으로 보장되는 노동이 아니다보니 학교와 학생회의 관계에 따라 언제라도 장학금이 없어지거나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학생회는 학생들의 자발적 결사체이자 조합으로서 학교당국 혹은 기타 사회의 여러 기관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장 큰 존재의의인데, 경제적으로 학교에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독립적인 투쟁 전략을 구사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다.


  따라서 위의 방식은 적절한 보상 방식이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우리는 학생회비를 통해서 활동비를 충당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생각은 금새 커다란 벽에 부딪히게 된다. 대부분의 학생회는 재정이 충분하지 않다. 재학생이 2만 여명 되는 4년제 대학의 학생회는 대개 1년에 5000만원 정도의 재정을 실질적으로 운용한다. 이 중에서 총학생회 선거와 차기 학생회에게 이월해줄 금액을 제외하고 나면 많아야 500만원 남짓의 여유가 생길까 말까 한 정도이며, 대부분은 예상치 못한 사안에 대응하기 위한 예비비로 사용되거나 예산이 부족한 다른 사업에 추가적으로 지원된다. 그러다보니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로부터 받은 장학금을 쏟아부어 사업을 진행하는 경우마저 볼 수 있을 정도다. 


오늘도 과로로 쓰러지기 직전인 학생회의 도비들...

  

  재정 외적인 면에서의 문제도 존재한다. 많은 학생들은 이미 학생회의 존재 의의에 대해 회의적이며 자신들이 납부한 학생회비가 그들만의 리그인 학생회 사람들의 급여로 지출된다는 데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학생사회 내부의 종사자들조차도 학생회는 무급 봉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 디자인 등의 전문인력이 필요한 일에도 보상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한다결국 불쌍한 우리의 학생회 도비들은 무급 봉사로 착취당한다. 학생회라는 조직이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기 위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들은 회의비, 교통비 등이나 지원받을 수 있으면 다행일 따름이다. 종합해보자면 재정 내적인 면보상을 제공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학생회의 재정, 재정 외적인 면학생사회 비/종사자들의 거부반응, 예결산안 처리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문제 해결이 난망하기만 하다.

 

누구도 일하려 하지 않는 학생회


이제 이런 책이 유행이라던데...


  이는 어떠한 문제를 가져오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학생회의 영속성을 파괴한다. 학생회의 존재 의의와 기존 담론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고민하는 학생회는 이제 별로 남지 않았다. 학생회에서 일한다는 것은 이제 개인의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많은 회의를 참석하며 의결기구 혹은 기타 학생단체 내지는 본부와 싸우고, 스트레스를 받고, 밤을 새고, 학업을 포기하고, 억울하게 욕을 먹기도 하고, 1년 동안 모든 일상을 학생회로 대체하고 나면 남는 것은 약간의 성취감과 피폐해진 심신만이 남을 뿐이다. 학생회의 일정을 따라가려면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과외도 알바도 힘들고 기껏해야 학교의 근로장학금 정도 밖에는 없다. 그런 현실에 노출된 개개인은 회의감을 갖게 되고 많은 경우 1년 이상 몸담지 않고 학생사회를 등지게 된다. 다시 말해 학생사회에 종사하는 것은 더 이상 어떠한 유인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얻는 것은 없고 잃는 것만 많은 일에 누가 뛰어들겠는가? 개개인의 활동 감소는 재생산의 가장 큰 적이다. 결국 이는 학생회 순환의 흐름을 끊어버리며, 다양한 담론들이 제대로 실현되거나 논의되기 어렵게 만든다. 학생회를 벗어난 의제 중심의 운동(노동권, 성소수자, 여성 등)이 최근 대두된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결책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대학본부와의 협의를 통해 확정적이고 안정적인 보상을 확약받는 것이다. 이는 몇몇 대학(학생회의 독립성을 위해 장학금 배정을 거부한)을 제외하면 상당히 많은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로는 학생회 재정의 확충 및 활동비 보장이다. Ep.5 학생회비를 둘러싼 몇 가지 쟁점들에서도 학생회비에 대해 다루었다. 학생회비는 80년대 이후로 재정적 답보 상황이다. 이에 대해 다양한 제도적 개선과 인식 변화를 통해 재정 확충을 꾀해 볼 수 있다(물론 필자는 회의적이다). 그리고 나서 활동비 보장 규정(교통비, 숙박비, 식비, 회의비 등)을 통해 최소한의 부분이나마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해결책이라고 말해놓았지만 굉장히 빈약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 문제는 학생회에 본질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문제점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학생회의 열정페이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짚어보았다. 후일 기회가 된다면, 과거와의 비교를 통해 인식변화/재정변화/사회변화와 함께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내 돈 쓰며 갈려나가는 학생회 도비들을 위해 이 글을 바친다. 언제나 학생사회에 대한 헌신만으로 일하는 그들에게 존중을 보여주길 바란다


by 완도김

살아남아라! 학생회! 1부 위기의 학생회

Ep.7 학생사회 양날의 검, 친목


  우리는 지금껏 학생회 재생산의 실패, 동기부여의 실패, 선거무산, 학생회와 학교당국의 관계에서의 전략 부재, 학생회비 납부율 하락, 학생회 예·결산안의 부실함 등 굵직한 문제들을 다뤄왔다. 이들 문제는 어느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학생회의 기능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느낌이 다른, 새로운 문제점 하나를 더 짚고자 한다. 바로 학생회 집행기구의 친목기구화라는 문제다. 누군가의 당혹감이 담긴 질문이 벌써부터 들려오는 듯하다. “아니, 친목이 무슨 대수라는 거야?”

 

학생회의 친목, 나쁠 게 있나?


아니, 친목이 뭐 어쨌다는 건가?


  사실 이러한 반응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친목(親睦)이란 말은 서로 친하여 화목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학생회 집행부도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공간인데 서로 친밀감이 있어서 화목해야 일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만약 집행부 구성원들 사이에 반목과 갈등이 심해서 제대로 분업이 이뤄지지 않고 각자가 일을 떠맡아서 진행한다면 그 집단의 업무효율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본다면 친목은 학생회라는 조직에게 있어서 플러스가 되는, 아니 더 강조하자면 필수불가결한 요소면 요소였지 문제적인 요소라고 생각되기는 곤란할 것이다.


  필자도 어느 정도의 친목이 학생회의 운영에 있어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친목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집단에서는 언제나 양날의 검으로 작동한다. 친목이란 개인의 기호와 공동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친목에는 개인마다 편차가 있기 마련이며 결국 경험의 코드를 공유할 수 없는 누군가가 소외되는 형태로 집단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 또한 전체집단으로부터 소외되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친목은 전체집단 내부에 여러 개의 소집단을 만들어 이들 간의 사이에서 충돌을 빚어낼 수도 있다. 결국 규모가 있는 집단에서는 단순한 개인적 기호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공동경험을 넘어서서 다 함께 협력할 수 있는 중심축이 필요하다. 그것이 곧 학생회의 기조가 되고 목표가 된다.


  결국 함께 모여서 일하고 있는 우리 집행부 구성원들이 어떤 학생회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는 것만큼 확실한 동기부여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동기부여가 없는 상황에서 친목만을 조장하려고 한다면 언제든 그 친목집단으로부터 이탈하는 사람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소집단의 집단사고라는 문제점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공통의 목표가 뚜렷하고 단합이 뛰어난 학생회라 하더라도 친목집단으로 변질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학생회가 처해있는 구조적 조건과 친목집단으로 변질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이 만나서 학생회의 크나큰 걸림돌로 변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학생회가 처한 구조적인 조건이란 무엇일까? 첫째 조건은 학생회 집행부에 대한 학우들의 무관심이라는 조건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연재분(1)에서 충분히 다뤘으므로 더 자세히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둘째 조건은 학생회 집행부에 대한 적절한 견제책의 부재이다. 이 역시 바로 지난 에피소드(6)에서 다뤘던 내용이다. 복잡한 예·결산안 처리와 같은 문제에서 학생회 집행부의 활동을 학우들이 혹은 학생 대표자들이 견제하고 감시할만한 제도적 방안들이 잘 마련되어 있지 않아 학생회 집행부의 양심에 전적으로 달려있는 공적 사안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이 마치 화약처럼 깔려 있다고 생각을 해보자.


넌 아닐 것 같지? ㅎㅎ....


  여기에 도화선을 놓는 것은 바로 집단사고(groupthink)의 문제점이다. 한국심리학회가 2014년 발간한 심리학용어사전에 따르면 집단사고란 집단 의사 결정 상황에서 집단 구성원들이 집단의 응집력과 획일성을 강조하고 반대 의견을 억압하여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의사 결정 양식을 말한다. 이러한 집단사고의 대표적인 예시이자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이 외교정책결정과정이론에 한 획을 그은 제니스(Janis, 1982, 1989)의 연구였다. 제니스는 1961년 케네디(J. F. Kennedy) 대통령의 특별자문위원회가 쿠바의 픽스만 침공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가 큰 낭패를 본 사건을 분석했다. 미국 대통령의 정책자문위원회라면 분명히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자 전문가들이 참가했을 텐데 왜 픽스만 침공이라는 황당한 작전에 만장일치로 찬성을 하게 된 것일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제니스는 서로 강한 유대감으로 묶여있는 집단에서 이러한 유대감을 깨고 싶지 않아하는 인간의 심리적 기제가 반대의견을 위축시키고 만장일치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음을 확신하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집단사고가 비합리적인 정책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규명된 것이다.


  애초에 그 분석의 대상이 정책결정이었던 만큼 이 문제는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학생회에게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내부 집단의 결속력이 뛰어난 것도 좋지만 친목집단으로 점점 변화할수록 학생회 집행부 역시 집단사고에 의해 지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예컨대 집행부 전체 회의를 가정해보자. 다른 부서에서 낸 사업이 맹렬한 비판을 받고 나아가서는 완전백지화까지 되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결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친목과 유대감으로 묶여있는 학생회 집행부라면 실제로 이를 비판하는 정도는 그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결국 결함투성이인 사업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개선되지 못한 채 집행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예시는 우리 주변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같은 관심사와 문제에 대한 비교적 유사한 관점을 공유하는 학생회 집행부에서 야심차게 사업을 준비했지만 학우들의 반응이 차갑기 그지없는 사업들 말이다. 이런 사례는 주로 강연사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강연사업을 기획하는 당사자들에게는 해당 분야의 권위자이자 유명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학우들에게는 인지도가 부족한 연사를 섭외하는 경우다. 집행부 내부에서의 집단사고가 일반 학우들의 관심사와 괴리된 결정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사업으로 좋은 호응을 이끌어내기 힘들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는 '학생회비를 낭비한 것 아니냐'는 비난에 시달려야 한다.


  이렇게 갈등의 도화선에 불이 붙으면 도화선은 곧장 화약과 만나 맹렬하게 폭발한다. 먼저 학생회를 견제할 만한 충분한 수단이 없기 때문에 졸속사업에 투입되고 낭비되는 자원들이 늘어난다. 다음으로 이러한 학생회의 행태가 누적되다가 폭로되거나 터져 나오면서 학우들의 학생회에 대한 신뢰가 다시 곤두박질치게 된다. 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은 줄어들고 학생회 집행부는 다시 고립되면서 응원을 받지 못하지만 견제도 받지 않는 방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학생회 집행부가 내집단의 결속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생들과 소통을 단절하고 자신들만의 리그로 후퇴해버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결국 학생회의 집단사고가 불러일으키는 비합리적 정책결정들은 이렇듯 연쇄폭발을 일으키며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해 버린다.

 

동성사회적 사고까지 더해진다면

  그런데 위와 같은 경우가 아니고도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하나가 더 있다. 바로 흔히 호모소셜(homosocial)’이라고 부르는 동성사회의 폐쇄성이라는 문제이다. 동성사회란 미국의 비평가인 이브 세지윅(Sedgwick, 1985)이 제시한 용어로서 사회적으로 성별이 동일하다고 인정된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는 사회적 유대 내지 연대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들 동성사회는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젠더 역할을 서로 확인하고 이에 미달하는 이들을 배척하면서 점점 젠더 역할에 대한 종속성을 강화한다는 특징이 있다.


남톡방 문제를 통해서 불거진 대학사회 내 동성사회의 폐쇄성과 폭력성의 문제


  예컨대 한동안 대학가를 뜨겁게 달궜던 남톡방문제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남톡방 사건을 통해서 남학생들이 카톡방에 모여서 서로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평가하며, 소위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취향들(ex. 축구, 게임 등)을 서로 공유하면서 유대감을 강화하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남성성이 주로 여성에 대한 통제력, 여성에 대한 우위 내지 지도력을 갖추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바로 그 남성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서로 확인하고 강화해주는 과정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남성성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과정이 폐쇄적인 단톡방의 구조(, 외부에 대한 익명성)와 폭력적인 문화(포르노 등을 통해 재현되는 성폭력에 친화적인 문화)라는 기폭제를 만나 폭력적인 언행들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학생회 집행부라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2015년과 2016년을 달궜던 남톡방 사건들 중에서는 학생회에서 인권관련 문제들을 다루던 집행부원이 가해자로 지목된 사건들도 있었다. 이는 친목을 위해 조장한 동성사회적인 유대감이 언제든 폭력적인 형태로 변질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실제로 오늘날 학생회 중에도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업무와 잦은 회의를 거치면서 소위 뒤풀이로 술자리를 갖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 여학생들은 (집에서의 통금시간이라던가 자취금지 등의 이유로) 빨리 귀가해야 하는 반면에 남학생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술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집행부 안에서의 성비와 무관하게 친목을 다지는 공간에서 남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동성사회적인 유대를 구축하면서 여성들을 배제할 수 있는 구도가 형성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성사회적인 유대가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형태로 변화하지 않도록, 언제나 집단 내의 친목문화가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학생들에게 언제나 신뢰를 주어야 하는 학생회 집행부라면 더더욱 말이다.

 

스스로를 견제하고 성찰하기 위한 제도적 고안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 안의 친목이 건강한 것인지 아니면 폭력적인 것인지를 늘 성찰하기 위한 제도적 고안이 필요하다. 제도적 고안이라고 해서 지나치게 거창한 것들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학생회칙을 개정한다거나 기구를 신설해야만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그냥 단순한 루틴(routine)을 하나 만들어 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좋다. 공동체 안에서 개인들이 느끼고 있을 서로 다른 고민거리를 털어놓고 서로의 문제에 귀 기울이는 문화를 만들기 위한 시도들을 해보자는 것이다. 예컨대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뒤풀이를 포함해서 한 주간의 학생회 친목활동에서 불편한 점이 있거나 고민이 드는 점이 있다면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다. 이때 일부러 비판점을 제시하는 데블스 어드버킷(Devil's Advocate)을 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러한 대화의 시간을 통해서 단위 내에서 차별과 소외를 예민하게 느끼는 구성원들(잠수함의 토끼들)이 발화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면 학생회 집행부 안의 친목이 얼마나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는지를 체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아니면 친목활동을 기획하는 역할을 한 사람이 도맡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그 사람의 취미와 취향을 중심으로 기획된 뒤풀이를 해보는 것도 좋다. 누군가는 보드게임 카페에 가보자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다함께 PC방을 가자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누군가는 참여할 수 있고 누군가는 참여할 수 없는 형태로 고정된 뒤풀이나 친목모임이 계속 반복되어 타성이 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 지금 우리 안의 친목은 얼마나 건강하고 얼마나 평등한가? 질문하고 반성하고 대화할 시간이다.


by 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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