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아라! 학생회! 1부 위기의 학생회

Epilogue 서른의 잔치는 끝나도 스물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1990년대를 풍미했던 시 중에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1980년대 당시 20대를 치열한 학생운동과 함께 보냈던 이들이 10여 년이 지나 서른 살이 되어 술자리에서 다시 만난 상황을 노래한 시입니다. 시 안에 그려진 풍경은 자못 씁쓸합니다. 국가의 억압에 맞서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던 이들은 이제는 30대가 되어 사회에 적응하고 현실에 자신을 밀어 넣으면서 굴절된 지 오래입니다. 시인은 이런 쓸쓸한 광경을 바라보며 고백합니다. 치열한 투쟁의 시기에 사랑했던 것은 운동 그 자체보다는 운동이 만들어낸 분위기, 사람들, 그 시대적 동질감이었다고 말입니다. 80년대가 주던 시대적 동질감은 90년대와 함께 퇴조하고 있었고 이제 운동도, 잔치도 끝나고 그 시절을 눈물 흘리며 회상하는 것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슬프고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는 시인의 자조어린 읊조림이 이러한 멜랑콜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1990년대를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의 감정에 울림을 주었기 때문일까요. 이 시를 포함한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년 베스트셀러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


  그러나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80년대 학번을 살아갔던 이들이 운동을, 잔치를 끝마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면 그 무엇도 시작해보지 못한 오늘날의 20대에게는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긴 전쟁만이 있을 뿐입니다. 199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노동유연화에 따른 양질의 일자리와 사회보장 축소, 2000년대를 지나며 완전히 세가 꺾인 경제성장 등의 이유로 오늘날 20대는 생존을 위해 더 치열한 경쟁을 감내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다양한 스펙들을 갖춰야 한다는 담론이 떠올랐습니다. 학벌부터 성형까지 7종 스펙이니 9종 스펙이니 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모든 스펙들을 관리해도 취직이 되지 않자 이번에는 무언가를 갖추는문제가 아니라 포기하는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결혼, 출산, 육아, 연애 등 갖춰야 할 것들의 리스트만큼이나 포기할 것들의 리스트가 길어지면서 N포세대란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점점 강해지는 경쟁은 비단 20대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닙니다. 모든 세대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일상화된 불안이죠. 그러나 운동 혹은 잔치를 끝낼 수 있었던 세대들과 운동은 경험조차 해보지 못한 세대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1980년대 운동(잔치)의 시기에는 탄압과 고통으로 힘들었어도 함께 이뤄야 할 시대적 사명이 있기에, 동지가 있기에 강력한 버팀목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경제적 호황기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잔치를 끝낼 수 있는 출구가 보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잔치를 끝마치고 났을 때, 그곳에는 아쉬움뿐만 아니라 매력이, 현실의 씁쓸함을 보충하는 낭만적인 회고가 뒤섞인 멜랑콜리가 남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N포세대는 그 어떤 잔치도 제대로 시작해본 적이 없습니다. 2012년 등록금 투쟁이 좌절됐을 때 청년 세대의 정치적 욕망은 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야 했습니다. 이따금씩 2013안녕들하십니까대자보 열풍처럼 억눌렸던 정치적 요구가 분출된 적은 있지만 그것이 유의미한 사회적 의제로 설정된 적은 많지 않았습니다. 결국 잔치의 출구는 고사하고 입구조차 찾을 수 없으며 함께할 정치적 동지는 고사하고 고통을 함께 나눌 친구나 애인조차 만들기 힘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의 대학생들, 젊은이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멜랑콜리에서 매력과 낭만적인 회고를 빼버리고 남은 것, 즉 일상화된 우울·무기력·냉소뿐입니다.

 

잔치가 아닌, 유예할 수 없는 나의 삶을 위해

  과거의 운동은 거대한 차원에서의 변화를 위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삶을 유예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유예된 삶의 고통을 보충해주는 부분들이 다름 아닌 시대적인 동질감, 동지들, 분위기들에 대한 낭만화였습니다. 그것들이 모여서 이루는 낭만화된 운동의 상()이 곧 잔치입니다. 그러나 잔치는 끝났습니다. 오늘날에는 오래된 낭만은 깨어지고 자신의 삶을 미뤄두더라도 그 삶이 이후에 안정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학생회를 더 이상 유지시킬 수 없는 이유입니다. 잔치가 끝났으니 이제 남은 것은 날 것 그대로의 경쟁에 던져진 삶뿐입니다. 각자도생의 전쟁을 치르기에 여념이 없으니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니 정치가 발생할 수 없고, 정치가 존재하지 않으니 정치를 위한 기구들이 사라집니다.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고, 학생회를 견제할 학생들이 없으니 학생자치기구들이 부패하고, 신뢰는 깨지고 제대로 되는 사업은 사라집니다. ‘위기의 학생회에는 이처럼 잔치가 끝났다는 시대적 조건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잔치가 끝난 이후에 우리들은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삶을 유예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대학은 점점 개별 구성원들의 삶이 펼쳐지는 현장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학이 만약 삶이 펼쳐지는 현장으로 인식된다면 사람들은 그 현장 안에 머무르면서 그곳을 바꾸고자 노력하고 힘과 지혜를 모으겠죠. 그러나 대학이 현장이 아니라 그저 4년만 지나면 뒤돌아볼 새도 없이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정류장에 불과하다면 누구도 곧 떠나버릴 공간을 위해 자신의 노고를 들이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돌이켜 생각해봅시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만 들어가면 이제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공부했는데, 막상 대학에 들어오고 나니 이제는 취업만을 바라보며 삶을 유예합니다. 그런데 취업을 하면 우리의 유예된 삶이 돌아올까요? 아니죠. 그때부터는 승진과 봉급을 올리기 위한 경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요? 시시각각 좁혀 들어오는 정년의 위협과 노후대책을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경쟁의 순환 속에서 유예된 삶이 돌아오는 순간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속한 공간 안에서, 그 공간을 현장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내려는 정치적 행위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유예해도 돌아오는 것은 쉼 없는 경쟁과 자기통제뿐이라면 그 짐들을 내려놓고 내 삶을 억압하고 있는 조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에서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에서의 삶을 더 이상 유예할 수 없기에 우리는 학생회를 만들고 정치와 운동을 복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학생회에게 살아남아라!”라고 외쳐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의 운동은 두 가지의 유예로부터 벗어나 우리들의 삶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첫 번째 유예는 과거의 운동이 답습했던 유예입니다.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니 당장의 삶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에 호소하는 것이죠. 그러나 역사적 사명감이라는 낭만화 기제를 빼내버리고 나면 그것을 유지시켜줄 동력은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체 사회의 변화와 우리들의 삶이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주는 설득력 있는 연결고리가 없다면 그 누구도 그 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 유예는 이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유예입니다. 그런 거대한 사회적 변화 같은 것은 아무짝에도 의미가 없는 허구일 뿐이니 당장의 경쟁에나 집중하라는 지배질서의 정언명령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따른다고 해도 거기에는 불안한 삶의 굴레만이 이어질 뿐입니다. 결국 그 두 가지 유예 모두로부터 벗어난 운동·정치를 복원할 때 학생회가 비로소 학생사회 안에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학생회는 대중추수주의나 조합주의로 빠져서 지엽적인 문제들만을 처리하다가 서비스업체로 전락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엘리트주의에 빠져서 당장의 현실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그 현실에 고통 받는 이들을 단순히 동원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제자리에 머물러서도 안 되지만 멀리 가자고 말만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분투하되 멀리 가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유예할 수 없는 삶에 말을 거는 올바른 방식이자 곧 대중운동이 형성되고 움직이는 방향이 아닐까요? 결국 오늘날 학생회를 하는 우리 모두에게 간절한 것은 학우들의 더는 유예할 수 없는 삶에 말을 거는 방법에 대한 고민과 실천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디로?

 안타깝게도 그 답을 대학연구네트워크가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희는 그러한 고민을 더 치열하게 해보고자 합니다. 살아남아라! 학생회!1부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위기의 징후들을 스케치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학생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부분들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현상 차원에서의 간단한 제도적 해결책을 제안해보는 것이었죠. 그러나 앞으로 대학연구네트워크는 살아남아라! 학생회!2부를 준비하면서 더 깊이 있는 내용들을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대학이란 무엇인지, 과거 학생운동의 지평 안에서 대학담론은 어떠했는지 등을 묻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것들을 계승하고 어떤 것들을 비판하고 기각할지를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조만간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1부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추후에 공개 세미나로 돌아올 예정이니 학생회에, 학생운동에 아직 관심이 남아있는 분들이라면 그 세미나에서 뵐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y 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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