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대학, 현장으로의 초대




심기용



 

아마, 우리는 탈대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여러분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인입니다. 여러분이 미래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며 사회를 이끌어가는 대학인입니다."

 

각 대학의 슬로건들은 언제나 듣기 좋다. 대학들이 슬로건처럼 운영되는가는 차치하더라도, 그 내용은 모두가 공감할 만한 대학의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대학의 의미는 대학이 사회의 취업관문처럼 기능할 때부터 많은 부분 상실되었다. 대학은 담론을 형성하고 사회 발전을 이끄는 기관이 아니라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거쳐야 할 길목이 되었다. 별다른 삶의 비전 없이 막연하게 가야 하는 곳. 많은 학생들이 그런 기관에서 졸업하기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돈을 내가며 다니고 있다. 의미도 상실되고 빚까지 지는 이 상황에서 탈대학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을까?

 

물론 탈대학을 상상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당장 탈대학부터가 무엇일까?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하라는 것일까? 대학을 자퇴하라는 얘길까? 아니면 대학의 기능을 대안적인 공동체 형성을 통하여 대체해야 한다는 것일까? 대학 졸업장 없이 잘살아 보자는 것일까? 탈대학이란 아득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머물 수는 없을 것 같다. 개인들이 천문학적인 자금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가며 얻는 것은 막연한 미래일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학인으로 성장하면서도 그 중 대다수가 사회담론과 괴리되어 있거나 기여하지 못한다. 구조가 비합리적인 비용을 과도하게 발생시키고 있으면서도 이 구조가 아니고서는 다른 사회적인 구도를 상상하기 어려운 작금의 상황은 참 모순적이다.

 

그러나 대학에 대한 비판이 대학의 폐기라는 결론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대학의 기능하지 않음, 효용감 없음, 또는 의미 없음을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이 반드시 대학을 폐기해야 한다는 당위로 이어지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대학이라는 훌륭한 인프라를 다시 전유해야 한다. 이미 구성된 것을 다시 다른 맥락에 배치하는 것을 재전유라고 한다면, 탈대학의 진정한 의미는 대학의 재전유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반동적인 폐기는 풍성함보다는 삭막함과 빈곤을 형성할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사유하는 존재이고, 그렇기에 학문을 요구하는 존재인 한, 대학의 필요성은 유령처럼 이 사회를 배회할 것이다. 대학의 폐기는 어차피 또 다른 대학의 구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맹목적인 반달리즘은 유효하다고 보기 힘들다.

 

대안적 상상력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예를 들어 현재의 대학교 기능은 고등학교 수준에서 해소하도록 한다고 생각해보자. 이미 대한민국 고등학교는 대학 입시를 위한 입시기관으로 전락한 지 오래되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고등학교 기간을 대학교 입시를 위한 3년의 기간으로 설정할 것이 아니라 아예 대학 강의 수준을 조정해서 고등학교를 현재의 대학 과정처럼 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한다면 사회적 시간 낭비를 줄이면서도, 현재의 대학들을 대학원의 개념으로 운용해 사회적 리더 양성과 학문 연구를 깊이 있게 진행할 여건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진로선택 과정에서 대학원을 선택하는 것만큼 대학 진학을 선택하는 것이 신중한 일이 되어야 한다. 대학의 구조조정은 이러한 문제들이 선결되어야만 해결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문제 해결을 막는 장애물은 밖보다는 안에 있다. 두 가지. 대학생들이 돈이 되지 않아서 인문학에 관심이 없다거나 가난하기에 탈정치화 되었다거나 하는 분석은 현재 상황을 낭만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사실 이 두 분석은 역으로 뒤엎어 생각해야 한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정치가 누구의 입장에서 정의된 것인지 말이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태만

 

 

하나하나 다시 생각해보자. 단순히 대학교를 대학원처럼 만드는 것이 대학 재전유의 전부는 아니다. 대학이 담론 생성과 교육의 기능을 제대로 담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특히 대학생 사회에서 주목받는 소통의 코드는 취업 시장에서의 생존 또는 연애 정도다. 대학 생활을 다루는 웹툰들만 보아도, 그 두 가지만이 작가들이 읽어내는 현실의 대학 코드이다. 그것은 낭만화되거나 비극화되며 대학의 주요한 사회성으로서 인정받는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어떤 고갈과 갈증을 느끼면서도, 대학 사회가 잘못된 예감으로 이 현상을 호명해왔다는 것이다. 바로 인문학의 위기라는 호들갑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중들이 인문학적으로 사유할 여유가 없고, 인문학적 텍스트와 콘텐츠가 생산되지 않거나, 생산되어도 소비되지 않는 현실을 지칭하기 위해 나온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문학이 대중과 유리된 특별한 것이고 특정한 인물들의 글과 말만이 인문학적으로 유효한 것이라는 오만함을 전제하는 개념이다. 인문 분야에 연구지원이 빈약해지거나 인문연구서에 대한 소비가 왕성하지 않은 것은 인문 연구자들의 위기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사정은 모두가 비슷한데, 인문학을 경시한다며 불특정 대중을 비난하는 것은 상황에 대한 지적 도피일 뿐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은 모두가 나름의 수준에서 사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인문학적 사유는 인문 연구자의 것이 아니다. 인문 연구자의 경제적 위기가 곧 인문학 자체의 위기라곤 할 수 없다.

 

대학의 위기를 인문학의 위기라는 분석과 연관 짓는 것은 위험하다. 인문학의 위기를 인정한다고 해도, 이 문제가 극복된다고 대학의 위기가 극복되는 것인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져 인문학 시장이 확보되는 것이 인문학 위기의 극복인가? 그래서 결국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것은 취업시장에서 인문학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허구적 기대감뿐이었다. "구글과 애플이 창의력을 본다고 하니 창의력이 필요하단다! 그리고 창의력을 얻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사유가 도움이 된다"는 논리가 그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인문학의 시장성을 어필할 때, 그것은 취업관문으로서의 대학이라는 위치를 더 강고히 만들 뿐이다. 그것은 도리어 현재의 대학 문제를 심화하는 일이다.

 

 

탈정치의 정치



대학인이 인문학적이지 못하다는 비판과 함께 나오는 것이 대학인의 탈정치적 성격이다. "저희 총학생회는 학우 분들을 위한 학생회로, 정치적 성격을 띠지 않습니다"는 식의 중립성 주장에서 대표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경향이다. 처음엔 탈정치라는 말을 수용해서 사용했지만, 몇 년간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경험한 후로 나는 이것을 탈정치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한다. 주로 이런 스탠스를 취하는 것은 영리함에서 나온 정치성일 뿐이다.

 

이런 정치성은 주로 매카시즘을 정치적 방식으로써 차용한다. 동국대학교 2017년도 총학생회장은 지난 9월 대뜸 기자회견을 열어 전 총학생회, 학내 사회주의 정당 활동을 하는 학생들, 기존에 학교 본부에 투쟁하던 학생들, 그리고 한 자치언론을 싸잡아서 정치적 이해관계로 단단히 연결된 사람들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학우 분들을 대의하면서 정파적 이해를 가지고 업무에 임했냐고 몰아붙였다. 재밌는 것은 이것이 총학생회장이 장학금 특혜 의혹이 터진 것에 해명하면서 한 말이었다는 것이다. 나한테 의혹을 제기한 언론은 불순한 단체가 소유한 언론이다! 라는 주장과 함께 마지막으로 덧붙인 것은 역시나, 나는 순수하다는 것이다. 총학생회장이기 이전에 한 개인임을 감정적으로 호소하면서 말이다. 나는 이것을 순결 정치나 순수 정치라고 부른다.

 

또 하나 유형은 총학생회가 모든 갈등을 방관하는 것이다. 어떤 정치적 연대, 학내 갈등 사안, 사회 이슈 등에 대해서 함구한다. 이들이 하는 것은 시설의 불편함을 개선하는 것, 축제를 무난히 여는 것, 간식 사업을 진행하는 것 등이다. 이런 경우 총학생회는 대부분 무능한 민원기구가 되어 간다. 이렇게 학생회를 운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갈등을 겪을 자신이 없는 것이다. 갈등을 겪어가면서 권력을 유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함구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함구 정치는 때로 유용할 수도 있지만, 당연히 반쪽짜리 학생회가 될 수밖에 없다. 공동체는 성장하지 않으며, 학생들이 오히려 정치적 공백만을 심하게 느껴 학생사회 자체를 붕괴시킬 위험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권력 유지 자체가 정치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난 이들의 정치성과 연결망들을 적극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향의 정치성은 나름의 사회성을 대학 안에 구축하고 있다. 이 사회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며, 도리어 대학의 생존 미학으로서 구성되고 있는 현상이다. 대학생 계층의 성격을 미리 규정하고 비관하는 것은 말 그대로 비관일 뿐이다. 수많은 대학 내 사회성들의 재편이 필요하다. 순수 정치, 함구 정치 등의 작동을 알고, 그것이 문제적이라면 사회망 내부에서 고장을 내야 한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동감 있는 현장과의 열렬한 교감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 대학 사회성을 모두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차용하고 재전유하면서 착취하는 구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건 현장의 생동감을 통해 욕망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대학인의 지도그리기: 현장을 가지는 일



나는 탈대학이 대학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벗어나, 어떤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대학은 현장을 다시 찾아야 한다. 현장을 구성하고, 현장에 개입하고, 현장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인문학 담론의 활성화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다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현장은 대학 밖의 물리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장은 자신이 긴밀히 호흡하는 어떤 배치를 의미한다. 관계망, 공동체, 담론의 지형 등. 학문이 질문하고 문제의식을 발전시킨 것들의 총합이라면, 우리는 좋은 문제의식들을 발전시킬 자극들이 필요하다. 현장이란 그런 자극들의 현장이다. 담론의 지형을 파악하고 지형 안에 자신의 문제의식을 적절히 위치시키는 일도 역시 현장성을 갖는 일이다. 어떤 현장으로부터 문제의식이 발현될 수도 있으며, 현장의 문제의식을 종합해내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이런 현장성이야말로 대학이 가져야 할 덕목이다.

 

예를 들어, 위안부에 대해 의미 있는 주장을 하거나 연구를 한다면 위안부와 관련 있는 현장 속에 대학인들이 위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소수자에 대해서 연구하고자 한다면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비롯하여 성소수자에 대한 질문들을 발전시키고 또 그것으로 기여할 수 있는 현장을 가져야 한다. 즉 어떤 판 속에 대학인이 자신을 위치시켜야 한다. 판에 자극되어야 하며, 새롭게 판의 현상을 포착하고, 개념을 생산하거나 유효한 분석을 판에서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대학은 그러한 대학인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사회망이 되어야 한다.

 

최근의 페미니즘에 대한 열망들이 바로 현장의 발생으로부터 발화되었던 점을 기억해보자. 수년간 여성운동가들의 기여가 있었지만 메갈리아 커뮤니티와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의 여성운동은 그 확장성이 남달랐다. 대학가에도 페미니즘이 주요한 담론으로서 수용되었다. 유효하게 사회적으로 가시화된 담론이 부재한 상황에서 페미니즘은 난파선마냥 홀로 주목받은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의 현장으로 들어가 자신을 위치시키고 발화하고 행동했다. 사람들은 지금 살아 숨쉬는 이야기,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호기심과 질문들을 현장으로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개념이 유통되거나 생산되었다. 담론 생산자로서의 대학인은 그런 배치를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유행하고 주류적인, 지금 당장의 현안에 대해서만 대학인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주제의 긴박함이나 중요도와 별개로 대학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사유함이다.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학인들이 그 문제의식에 맞는 현장을 구성하고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의식에 생동감을 부여해야 한다. 의례적인 질문들만 반복되고 계승되면 학문은 생동감을 잃고 문제의식은 발전하지 않는다. 현장은 그런 생동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다. 세상을 뻔하게 바라보지 않게 해주는 배치. 그 배치 안에서 대학인은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나가야 한다.

 

지금 대학은 질문의 생동성을 잃어버린 사막 같은 공간이 되어버렸다. 대학의 위기는 그 점에서부터 극복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극복의 실마리가 막연한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총장 직선제를 요구하는 대학인들, 학교의 불통 행정을 비판하고 행동하는 대학인들, 어떻게든 대학과 사회 현안을 연결해 목소리를 내려는 작고 큰 움직임들, 생동감 있는 현장을 살아내는 대학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한다. 대학은 대학의 순위, 대학의 시장성, 대학의 국제적 평점에 더 큰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이 생동감의 현장을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 대학은 기업이 아니라, 대학인들의 현장을 지원하는 사회망이 되어주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현장을 되찾을 수 있을 때, 이 현장들과 함께 숨 쉴 수 있을 때 대학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소개]


심기용

동국대학교 사학과 재학.

게이로서 살아가다가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참여하여 활동 중.

동국대학교 큗 초대 회장.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 7대 의장.

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공동저자.



<외줄산책>은 경계선에 서서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는 것 같은 생각들을 모아 산책하듯 가볍고 즐겁게 이야기해보고자 만들어진 잡지입니다창간호는 대학을 그 대상으로 삼았습니다탈대학이라는 키워드를 던진 것은 대학을 벗어나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자는 것보다는대학의 기능과 위치와 역할을 다시 사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였습니다가볍기만 한 글들은 아니지만독자들이 하루 종일 함께 산책하듯 읽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메일 wonderinglee@gmail.com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pg/singlelinewalk



[바로가기]

2017/12/12 - [[특별연재]외줄산책:탈대학] - <외줄산책: 탈대학> 대학연구네트워크 연재를 시작하며

2017/12/18 - [[특별연재]외줄산책:탈대학] - <외줄산책: 탈대학> 머리말(이재임)

2017/12/25 - [[특별연재]외줄산책:탈대학] - <외줄산책: 탈대학>실패한 인터뷰 - 몽상(박규민)

2018/01/09 - [[특별연재]외줄산책:탈대학] - <외줄산책: 탈대학>‘이상과 현실 사이’, 그 이후 - - 다시 한 번 더 쓰는 동국대학교 교지편집위원회의 생존기 (이재임)




* 이 글은 외줄산책 편집위원회의 요청으로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 라이센스로 배포됩니다. 라이센스를 위반한 무단 전재와 공유 등을 하실 경우에는 민형사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 해당 글은 <대학연구네트워크(준)>과 더불어 한국대학학회가 발행하는 <대학:담론과 쟁점> 통권 5호에도 수록되었습니다.

* 내부 사정으로 인해 예정보다 연재가 한 주 지연되었습니다. 기다려주신 독자들과 외줄산책 편집위원회 여러분들께 죄송하단 말씀 드립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