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바깥은 없다




권영민




, 비참하게 죄를 덮어쓴 무고한 자여! 너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 즉 교양제도를 너희가 얻지 못했기 때문이지. 즉 너희에게 목표를 설정해주고 스승들을 마련해주며, 방법을 알려주고 귀감이 될 만한 인물들, 동지들을 제공해줄 수 있으며 (...) 마음을 고양시키는 숨결을 그들에게 뿜어낼 수 있는 그런 교양제도 말이야.” 

- 니체,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



대학의 위기이다. 그건 대학의 위기인 동시에, ‘위기의 대학이다. 그렇다면 이런 지젝-데리다식 농담은 어떤가? 대학은 항상-이미위기였고, 따라서 위기라는 대학의 불가능성의 조건은 역설적으로 항상-이미대학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러나 이런 농담 속에 전도된 (혹은 도착적/왜상적) 진리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학의 가능성의 조건항상-이미대학의 불가능성의 조건이라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대학은 위기라는 쓰레기 더미를 양분으로 해서만 피어나는 괴물 같은 꽃, 혹은 꽃 같은 괴물이다. 왜 그런가? 후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의 위기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진정한 학문적 성격(echte Wissenschaftlichkeit), 즉 학문이 자신의 과제를 세우고 이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학문의 방법론을 형성하는 방식 전체가 문제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각주:1] 후설에 따르면, ‘학문의 위기학문의 방법론을 형성하는 방식 전체문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의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우선 학문의 방법론을 형성하는 방식 전체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 우리가 그것을 문제시할 때 학문의 위기는 더 이상 학문의 불가능성의 조건이 아닌 가능성의 조건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학문하는 공간으로서 대학을 형성하는 방식 전체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학문은 알기를 원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980a)[각주:2] 그런데 이 앎은 두 가지 방식의 앎으로 나뉜다. ‘필요anankaia’를 위한 앎과 여가의 삶diagōgē’을 위한 앎(981a). 이 두 가지 앎의 방식 중에서, “우리는 언제나 뒤의 기술[여가의 삶을 위한 앎]들을 발견한 사람들이 앞의 기술[필요를 위한 앎]들을 발견한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진 여러 가지 인식은 유용한 쓰임chrēsis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앎, 혹은 더 지혜로운 앎은 필요와 상관없이’(980a)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요와 상관없이아는 것은 대체 무엇을 아는 것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앎에다 더 지혜롭다는 면류관을 씌우는 것일까? 그 면류관의 자격은 원인들prōta aitia’과 원리들‘archai’을 아는 것이다. “지혜라고 불리는 것은 원인들과 원리들에 관한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이렇게 말한 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론적인 지식들은 실천적인 것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어떤 원리들과 원인들에 대한 학문적인 인식임이 분명하다.”(982a) 더 나아가 이런 원리들과 원인들에 대한 학문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자격을 얻는다. 왜냐하면 원인들에 대해 가르치는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이 더 지혜롭기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지시를 내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그의 말을 따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학문하는 공간대학을 형성하는 방식 전체에 대한 출생증명서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학은 자신의 출생을 얼마나 배반하고 있는가? 무엇보다도원리들과 원인들에 대한 학문적인 인식’, 보편적인 학문katholou epistēmē’(982a) 대신 필요를 위한 앎을 얻기 위한 공간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학문은 주로 첫째가는 것들ta prōta을 다루는 학문들이 학문들 가운데 가장 엄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학문이 추구하는 대상인 첫째가는 것들과 원인들이 가장 높은 수준의 인식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대학은 필요를 위한 앎에 종속되어 저급한 수준의 인식만을 반복하는 공간이 된 것이 아닌가? 급기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학문이 신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신은 모든 것을 주재하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며 어떤 원리이기 때문이다. 즉 대학은 신적인 학문, 혹은 학문의 신인 고귀한학문의 전당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필요와 상관없이’, 즉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앎의 목적, 앎을 위한 앎이라는 목적 때문에 신적인 것의 지위에 있던 형이상학-인문학은 19세기 계몽주의의 완성자인 칸트에 이르자 낮은자리로 내려온다.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필요에 의한 앎과 필요와 상관없는앎을 나누는데, 이것은 칸트가 당시 산업사회의 노동개념인 노동의 분업[각주:3]을 학문 혹은 대학의 이념에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 유명한 칸트의 이성의 분업’,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분업도 마찬가지이다.) 학문의 분업은 세 개의 고귀한higher/übern’ 학문(신학, 법학, 의학)과 하나의 낮은lower/untern’ 학문(철학) 사이의 분업인데, ‘고귀한학문은 공적인 일, 즉 정부와 관련을 맺는 학문이고 낮은학문은 그 자체에 대한 흥미만을 추구하는 학문이다(CP 25). 하지만 칸트가 철학 - 요즘의 교양교육 -낮은혹은 저급한학문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우리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낮은자리는 여전히 아무도 그 자리를 침범할 수 없는 그들만의자리, 자율성’(CP 23)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교양교육이라는 고독한 짐승의 영역표시이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정부는, 정부와 관련을 맺는 고귀한학문들을 규제할 권리가 있지만 학문 그 자체에 대한 흥미만을 추구하는 낮은학문에 관련한 문제는 학자의 이성에 맡겨야 한다(CP 27). 이성은 본성상 자유롭기 때문에, 정부는 어떤 것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할 수 없다. 즉 진리는 명령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학문은 정부의 어떤 명령도 받지 않는 자율성의 공간이다. 여전히 교양교육은 이성을 통해서 진리를 밝히고 독점할 저급한학문이다. “여기에서 철학[교양교육]과 정부 사이에 하나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철학[교양교육]은 정부의 억압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철학[교양교육] 고유의 관심사를 추구할 수 있었고, 반면 정부는 철학[교양교육]이 순수한 사색에만 집중하고 실천적인 문제에는 개입하지 말라는 똑같이 이성적인요구를 할 수 있었다.”[각주:4]


그렇다면 과연 형이상학-교양교육은 필요와 상관없는학문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와 철학-교양교육의 자율성이라는 칸트적 이념은 정당한 것인가? 대학에서 학문의 분업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칸트적 이념에 대해서 니체는 한 세기 뒤에 다음과 같이 통렬히 비판한다. “우리 학자들의 편협한 전문성을, 그리고 이들이 올바른 교양에서 점점 더 멀리 벗어나 헤매고 있어도 그것을 [사람들은] 도덕적 현상으로 경탄해 마지않습니다. ‘사소한 것에의 충실’, ‘육체노동자적 성실은 호화 주제이며, 전공을 넘어선 분야에서의 무지는 고귀한 자족의 표시로 널리 전시됩니다. (...) 학문에서의 분업은 (...) 언젠가 [학문의] 분신자살이라는 파국을 불러올 것입니다.”[각주:5] 그렇다면 대학은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율성의 공간인가? 그러나 오늘날 대학 혹은 교양교육의 순수성을 유지하여 대학이 실천적-정치적 관심사에 뒤섞이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신념은 하나의 허구일 뿐이다.[각주:6] 그리고 니체는 오히려 이러한 대학, 더 구체적으로 대학 내 교양교육의 자율성이라는 환상이 대학과 대학에 다니고 있는 젊은이들의 학문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선생은 이 듣고 있는 학생들에게 말을 하지. 그 밖에 그가 사유하고 행위하는 것과 학생들이 지각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가로지르고 있지. 종종 학생이 말하는 동안 교수는 읽는다네. 일반적으로 교수는 그런 청중이 되도록 많이 왔으면 좋겠고, 정 안 되면 몇 명으로도 만족하지만, 한명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네. 말하는 입 하나와 아주 많은 귀들, 그 반쯤 되는 수의 필기하는 손들 - 이것이 학술 기구의 외양이고, 작동하는 대학의 교양기계라네. 게다가 이 입의 주인은 많은 귀들의 소유자들과 분리되고 무관하네. 이 이중적 의미에서 자율성을 사람들은 감격하게 학술적 자유라고 칭송하지. 그런데 그 한 사람은 - 더 많은 자유를 위해 - 자신이 원하는 것을 대충 말하고, 다른 이는 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대충 듣지. 다만 이 두 집단 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국가가 긴장된 감독관의 표정으로 서서 가끔 자신이 그 특이한 말하기와 듣기 과정의 목적이고 목표이며 본질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을 뿐이야(교육기관276-277).[각주:7]


그렇다면 대학의 바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데리다는 현재의 군수산업의 예를 들면서, 대학이 추구해온 자율성의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대학의 바깥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교양교육은 더 이상 필요와 상관없이하는 신적인 학문이 아니며, 따라서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적인 학문도 아니며, 그래서 대학도 신적인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쟁과 국가적, 국제적 안보에 도움이 된다면, [군수사업의] 연구 프로그램은 모든 정보 분야, 즉 언어와 모든 의미론적 체계의 본질, 번역, 암호화와 암호 해독, 현전과 부재의 유희, 해석학, 의미론, 구조 언어학과 생성 언어학, 화용론, 수사학 등의 모든 지식의 축적을 포함할 것이다. (...) 군사 예산은 다소 이익을 늦게 보더라도 그 어떤 것 - ‘기초학문들, 인문학, 문학이론, 철학 에도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8] 오늘, 대학의 바깥은 없다.


그럼 이제 바깥이 안이고 안이 바깥이 된 대학(“연구의 정향orientation’은 제한이 없다” (PR 13))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물론 우리는 어느 누구도 우리 교양의 미래와 그와 관련된 우리 교육수단 및 방법의 미래에 관한 의견을 예언의 목소리로 말해서는 안 된다.”( 교육기관167)는 니체의 전언을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한 것은 대학의 미래에 관한 예언이 아니라 비판이며 동시에 비판하는 기관으로서의 대학’, ‘비판으로서의 교양교육이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교육제도에 가장 적합한 예언이 된 다음과 같은 니체의 비판처럼 말이다.


소득과 가능한 한 최대의 화폐수입이 교양의 목적이고 목표입니다. 이 방향에서는 교양은 대략 사람이 자기 시대의 정점위에서 존속할 수 있게 해주는 인식,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모든 길을 알려주고, 사람들과 민족들 간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모든 수단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통찰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이 방향에 따르면 원래 교양의 과제는, 우리가 보통 동전을 쿠란트라 부르듯이, 가능한 한 쿠란트적 인간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 민족은 더욱 행복하게 됩니다. 개개인을 그의 본성적 성향보다 더 금전적이 되도록 장려하는 것, 그가 자신이 가진 인식과 지식의 양으로부터 되도록 많은 양의 행복과 이익을 얻어내도록 교육시키는 것, 그것이 근대 교육기관의 목적입니다.”(교육기관194-195)

 

비판은 무조건 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판은 자기음미이다.[각주:9] 그렇다면 비판으로서의 교양교육’, ‘비판하는 기관으로서의 대학의 자기음미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유이다. 하지만 이 때 사유는 더 이상 행동의 반명제로서의 사유가 아니다. 오히려 사유개념행동’, ‘개념응용’, 이론적 견해와 실천, 이론과 기술 사이의 개념적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사유이다.(PR 9) 니체는 무릇 사람은 자신의 관점만 가져서 되는 게 아니라 생각도 할 줄 알아야지![Man muss nicht nur Standpunkte, sondern auch Gedanken haben!]”(교육기관183)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유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필요와 상관없이하는 사유가 아니라 사유를 통해서 기존의 원리들과 원인들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대학이 실용교육에 빠진 채 필요와 상관 없는교양교육을 등한시하고, ‘사유를 도외시하며 기초학문을 무시한다고 화낼 필요가 없다. 그런 자율성은 없다. 그 대신 이제 말했듯 대학의 바깥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대학을 지배하는 이러한 원리들과 원인들’, 온갖 종류의 질서들, 권력들, 자본들, 욕망들, 인간들을 사유를 통해 문제시하는 것, 거듭 말하자면 비판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대학의 위기. 후설에 따르면 학문의 위기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진정한 학문적 성격echte Wissenschaftlichkeit, 즉 학문이 자신의 과제를 세우고 이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학문의 방법론을 형성하는 방식 전체가 문제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대학의 위기의 ()가능성은 항상-이미’ ‘학문의 방법론을 형성하는 방식 전체문제시하는 것이다. 즉 대학을 지탱시켰던 자율성이라는 환상, ‘필요와 상관없이’ ‘원리들과 원인들을 탐구하는 신적인 학문의 전당이라는 환상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비판으로서의 대학자기음미이다. 자기음미비합리주의’, 혹은 지젝의 표현대로 뉴에이지 반계몽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다. 오히려 이 비판으로서의 교양교육이중적 제스처’(PR 17)를 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학문의 전통을 준수하고 전문적 자질을 기르면서 그 전통 안에 존재하는 심연사유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비판공간으로서의 대학에 대한 사유는 단지 문제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글쓰기 방식, 교육적 접근, 아카데미의 교환 과정, 언어와의 관계, 다른 학문과의 관계, 혹은 제도 일반과의 관계를 변형시키는 것”(PR 17)이다.[각주:10]


대학은 죽어가고 있는가? 지방대학은 죽어가고 있는가? 편집자가 내게 원고를 청탁하며 던진 질문이다. ‘필요와 무관한 앎을 얻었는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자율성을 확보했는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대학은 죽었다. 하지만 대학이 필요와 무관한 앎을 얻는 공간도 아니고, ‘자율성을 확보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면? 원래 대학이란 공간은 니체의 말처럼 쿠란트적 인간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라면, 데리다의 저 유명한 텍스트 밖은 없다라는 말을 비틀어 대학의 바깥도 없다고 한다면, ‘필요를 위한 앎이라는 목적에 종속되어 자율성이란 없는 지금의 대학은 조금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니체도, 데리다도 이것이 대학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학이 쿠란트적 인간을 키우는 공간이라는 것을 전제로, 대학이 지금 존재하는 방식인 쿠란트적 인간을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지금의 방식을 비판하려고 해야 한다. 만약 대학이 죽어가고 있다면 비판 대신 예언만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너무 칸트적이거나 지나치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식으로의 비판에만 길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가 수행해야 할 비판은 비판을 넘은 비판, -구축de-construction의 비판이다. 대학 바깥에서의 비판만으로는 대학의 탈-구축이 가능할리 없다. 대학에서의 글쓰기, 수업 방식, 입시, 서열화, 계급과 직업의 배분 관계 전체를 변형시켜야 하는 어려운 외줄타기의 과제가 지금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외줄 타는 사람들, 다시 말해 희망에 가득찬 사람들이 있다.

 


““자명한 사람들과 고독한 사람들 사이에는 싸우는 투사들, 다시 말해 희망에 가득 찬 사람들이 있다.”

-니체,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 


[필자 소개]


권영민

작가.

대학원에서 현상학을 전공했다.

저서 철학자 아빠의 인문육아, 공저셀터스, 난민을 위한 건축.

서경식 선생의 내 서재 속 고전속 대담의 대담자 중 한 사람.

한국일보와 매일신문에 정기칼럼을 썼고, 쓰고 있다.



<외줄산책>은 경계선에 서서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는 것 같은 생각들을 모아 산책하듯 가볍고 즐겁게 이야기해보고자 만들어진 잡지입니다창간호는 대학을 그 대상으로 삼았습니다탈대학이라는 키워드를 던진 것은 대학을 벗어나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자는 것보다는대학의 기능과 위치와 역할을 다시 사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였습니다가볍기만 한 글들은 아니지만독자들이 하루 종일 함께 산책하듯 읽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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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대학연구네트워크(준)>과 더불어 한국대학학회가 발행하는 <대학:담론과 쟁점> 통권 5호에도 수록되었습니다.

* 내부 사정으로 인해 예정보다 연재가 이틀 지연되었습니다. 기다려주신 독자들과 외줄산책 편집위원회 여러분들께 죄송하단 말씀 드립니다. 


  1. 에드문트 후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한길사, 1997, p.61. [본문으로]
  2.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2004, 문예출판사, p.50,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본문 중에 Bekker판의 쪽수만 기입한다. [본문으로]
  3. Immanuel Kant, The Conflict of the Faculties/Der Streit der Fakultäten,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79, p.23(이하 이 책의 내용은 약호 CP로 본문 중에 인용함). [본문으로]
  4. 크리스토퍼 노리스, 『데리다』, 시공사, 1999, p.239(번역은 인용자가 일부수정). [본문으로]
  5. 프리드리히 니체,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유고(1870년~1873년)』, 책세상, 2001, pp.197-198(이하 이 책의 내용은 약호 「교육기관」으로 본문 중에 인용, [] 안의 내용은 인용자가 삽입). [본문으로]
  6. 크리스토퍼 노리스, 앞의 책, p.239. [본문으로]
  7. 우리의 대학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는 필요를 위한 앎, 즉 경영대, 사범대, 의학 등 필요를 위한 앎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타락했고, 칸트적 관점에서는 교양교육도 영어교육으로 전치되어 버렸고, 니체적 관점에서는 교수와 학생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슬프게도 지방대의 경우 ‘취업전체주의’라 부를만한 영향 하에 이러한 양상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본문으로]
  8. Jacques Derrida, “The Principle of Reason: The University in the Eyes of Its Pupils”, Diacritics Vol. 13, No. 3. (Autumn, 1983), p.8(이하 이 논문의 인용은 약호 PR로 본문 중에 인용함): 니체에 따르면 ‘자율성의 최대의 적’은 자신을 이끌어줄 지도자를 찾는 것이다. “인간은 가장 어렵고 진지한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어, 그가 올바른 방식으로 이 문제들에 접근하여 제때 강렬한 철학적 경외심에 빠질 때, 이를 토대로 해서만, 즉 비옥한 지층 위에서만 심오하고 고귀한 교양이 자라날 수 있는 법이지. (...) 이 나이에 인간은 이끌어주는 손을 가장 필요로 한다네. (...) 남의 도움이 가장 필요한 상태, 즉 이 자연스러운 상태는 현대의 교양 있는 젊은이들이 교육을 통해 달성해야 할 목표인 저 인기 있는 자율성의 최대의 적”(「교육기관」278-279쪽, 강조는 인용자). [본문으로]
  9.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한길사, 2005, p.15. [본문으로]
  10. 이것이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의 일반전략’이다. (자크 데리다, 『입장들』, 솔, 1996, p.65.)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비판으로서의 교양교육’의 ‘사유’의 “해체의 운동들은 바깥으로부터 구조들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 구조들 안에 들어앉음으로써만 가능하고 효율적이며, 타격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구조들 안에 들어앉음으로써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그 속에 들어와 있고, 우리가 이를 알아채지 못할 때는 더욱더 그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해체의 시도는 필연적으로 내부로부터 작용하고, 옛 구조로부터 전복의 전략적이고 경제적인 모든 수단들을 빌린다.”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동문선, 2004, p.5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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