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아라! 학생회!

Ep.2 “운동을 떠난 학생회는 불가능할까?” 어느 방랑자의 고백


나는 소수의 인원을 갈아 넣고 고통에 빠트려서라도 

학생회가 존속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지 도저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 《살아남아라! 학생회!》 Ep.1 "왜 살려야 할까?" 중에서

 

들어가며


 이제 학교가 지겹다. 아니, 정확히는 학생사회에서 무언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겹다. 그런데 그만둘 수 없다. 이유는 모른다. 입학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그 전해에 구성되지 못한 학생회 선거를 뛰었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아주 약간의 의심만 있었더라도, 아니 왜 학생회장이 안 뽑혔는지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5년이란 시간을 조금 더 알차게 쓸 수 있었을 텐데, 19살 어린 아이였던 나는 이제 더 이상 우러러 볼 선배가 없는 5학년이 되었고, 술과 불규칙한 생활로 인해서 건강도 망가졌다. 이룬 것은 없는데, 시간은 너무나도 많이 흘러버렸다.

 

  이전 글에서 포포는 “소수의 인원을 갈아 넣고 고통에 빠트려서라도 학생회가 존속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지 도저히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고민했다. ‘왜 학생회를 살려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그 앞의 전제조건에 대한 고민을 던져보려 한다. ‘운동을 떠난 학생회는 불가능한가? 그리고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학생회가 아니어도 우리의 운동은 계속될 수 있고, 계속되어만 한다고.

 

  만약 당신이 속한 학교에서, 당신의 공동체(단대, 학과 등)에서 당신이 속한 모임(조직)이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다면 이 글을 가볍게 스킵하기 바란다. 이 글은 학생회의 재생산조차 해내지 못한 어느 방랑자가 학생회를 떠나서 고군분투한 기록이다.


학생회가 운동 그 자체인 시대는 지났다


비록 선배들이 피땀으로 일궈낸 학생회지만 학생운동의 헤게모니가 사라진 지금

운동으로서 '학생회'라는 양식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입학하자마자 학생회 선거운동을 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동기들로부터 ‘너 운동권이니?’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운동권이었고, 그 정체화에 약간의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운동권이며 내가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이며 최근 나의 관심사는 무엇인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유했다. 그런데 우리 학교 학생회의 주류들은 달랐다. 비슷한 질문에 그들의 답변은 ‘부정’ 또는 ‘요즘 세상에 그런 도식은 무의미하다’는 등...의 모호함으로 일관했다.

 

 이 연재를 시작하며 ‘본래 학생회는 독재에 저항하는 운동으로서 학원민주화운동과 함께 시작된 단체입니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학생회는 태생적으로 ‘운동적’ 요소가 있음에도 요즘 보면 ‘우리 운동권 학생회에요~’라며 당당히 말하는 학생회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단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본인이 속한 대학의 총학생회는 분명 운동권임에도 본인들은 운동권 총학생회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실제로 내가 속한 모임의 새내기가 총학생회장과 밥을 먹으며 ‘듣기로 이번 총학생회 운동권이라던데...’라고 얘기를 꺼내자 그 총학생회장이 양손을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학생회의 지속적인 수권을 위해서 위에 언급한 운동권 부정과 모호한 입장들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동권은 학생회 수권을 위해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꿔내기 위해서 활동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현재 스스로의 공간에서 마주치고 있는 학생대중의 뿌리 깊은 운동 혐오 정서를 돌파해낼 수 없다면, 왜 꼭 축제기획, 민원처리 등으로 활동가들의 역량을 소모해가면서까지 학생회 수권에 목을 매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할 사람이 부족해서 10학번이 아직까지 군대도 못가고 학생회에 남아서 집행부를 하고, 07학번이 군대를 제대하고 돌아와서도 학생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들의 ‘헌신’에 진심으로 감탄하나, ‘그렇게까지 하면서 학생회를 수권해야 하나?’ 묻고 싶다.


우리의 운동의 재생산을 위해서 학생회는 필요하다?

 

학생회를 할 수록 늘어나는 건 희망이 아니라 뱃살이다(...)


우리 모임은 ‘학생회’의 재생산에 실패했다. 별 탈 없이 무난하게 2년간 잘 했음에도 그렇다. 학생회 재생산에 실패한 후 우리 모임은 학생회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조차 충족시키지 못했고, 학교에 홀로 남은 나는 학생회는커녕 당장 모임의 존속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마주했다. 선배들이 원망스러웠다. 왜 학생회를 해가지고...

 

  운동의 재생산을 위해서 학생회는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러나 누구나 주지하고 있듯이 학생회는 망하고 있고, 그 ‘망함’의 형태는 사람이 안 모이고, 유의미한 의제를 생산해내지 못하고, 달력사업[각주:1]을 유지하기에도 벅찬 상황에 마주하고 있다. 학생회를 통해서 학생대중과 호흡한다고 하지만 더 이상 학생대중은 운동적인 의제에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아니 조금 적나라하게 말한다면 야유를 보낸다. 학생회를 찾아와서 함께 하고자 하는 집행부들은 어찌어찌 구해진다 할지라도, 당장 우리 집행부들을 조직해내기도 쉽지 않은 상황 아닌가? 집행부조차 해당 학생회의 운동적 가치나 미래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슨 학생대중을 만나겠다고 하는지 당최 모르겠다.

 

  학생회는 바쁘다. 임기 시작하자마자 중앙단위는 등록금심의로 바쁘고, 산하 단위들은 새로배움터 준비로 바쁘다. 이뿐인가? 축제, 농활, 개강, 종강, 전학대회, 확대간부수련회 등 학생회의 명맥이 유지되는 이상 포기할 수 없는 ‘관례적인’ 사업들이 많다. 운동적으로 유의미한 실천을 하고자 하는 학생회 관계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앞서 언급한 사업들을 위해서 소모되고 있다. 저 사업들을 통해 약간의 운동적 가치를 전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운동적 가치는 전혀 없거나, 그 아주 약간의 운동적 가치에 조소를 보내는 학우들을 접하게 된다. 이쯤 되면 다시 물어봐야 한다. 정말로 운동의 재생산을 위해 학생회가 필요한 것인지. 학생회를 통해서 단순하게 지인이나 관계자를 많이 만드는 것을 넘어선 조직의 재생산이 가능은 한 건지 다시 물어봐야 한다. 오히려 그나마 남아있는 활동가들을 관례적인 사업에 투입함으로써 그들의 운동적 실천이나 역량을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1994년까지만 해도 대학에서 민중가요와 몸짓은 '이상한 문화'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는 남들보다 조금 어린 나이에 ‘운동’을 시작했다. 17살부터 시작된 세상을 바꾸기 위한 내 자그마한 헌신은 그만큼 일찍 지치게 했다. 19살, 동기 새내기들은 수습집행부를 할 때 나는 새내기지만 국장을 맡았고, 20살엔 속한 모임에서 사실상 리더가 되었다. 21살엔 학생회내 모 특위 위원장이 되었고. 나는 지쳤고, 도망치고 싶었다.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는 응당 많은 로망을 가지고 대학생활의 첫발을 내딛는다. 미팅을 꿈꾸기도 하고, 선배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선배 밥 사주세요~^^’를 앵무새처럼 반복하고도 싶다. 수업이 조금 일찍 끝나는 날엔 공기 좋은 공원에 가서 낮술도 하고, 공강 날에는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도 싶다. 그런데, 학생회를 하는 사람들에겐 이 모든 것이 사치다. 크게는 세상의 진전, 적게는 학생자치의 활성화를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희생’이 강요된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학생회는 학생대중과 호흡하며 그들을 조직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해에 학생회를 함께하자며 나보다 6학번 위인 선배가 내게 해준 말이다. 물론 나는 그 선배가 속한 조직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그와 함께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 말은 꽤 오랜 시간 내가 학생회에 자발적으로 나를 갈아 넣을 동력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딱 2년이었다. 2년 동안 학생회에 나를 갈아 넣고 나니 같은 모임의 선배들이 모두 학교를 졸업했고, 내게 남은 건 3학년이지만 여전히 모임의 막내라는 난센스와 학교에 홀로 남겨졌다는 두려움이었다. 운동의 재생산을 위해서 학생회는 필요하다고 한 선배들은 떠났고, 동지는 간데없고 홀로 깃발만 지키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고난의 행군, 황무지 개간 그리고 수확

 

 27개월. 학교에 혼자 남은 1인 모임 상황에서 새로운 신입이 들어올 때까지 걸린 시간이다. 그 기간 동안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대자보를 붙이고 각종 연서명에 함께했다. 심지어는 외국에 교환학생을 가 있는 동안에도 외국에서 대자보를 작성해 과 후배를 동원해 인쇄랑 부착까지 부탁했다. 그렇게까지 하다 보니 이제 어느덧 15명이나 되었다.  

 

  학생회를 버리고 난 운동은 분명 고통스러웠다. A1 사이즈로 시원시원하게 뽑아내던 대자보의 사이즈가 A3까지 줄어들었고, 한 건물에도 두어 장씩 붙이던 대자보를 한 건물에 한 장씩 붙이는 것도 참 부담스러워졌다. 컬러로 포스터 뽑을 돈이 없어서 애초부터 포토샵으로 흑과 백 두 색으로 포스터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자유로웠다. 그놈의 ‘학생대중’이 두려워서 쓰지 못했던 성명서도 맘껏 쓸 수 있었고, 그 어떤 운동적 의미도 찾을 수 없던 축제의 연예인 섭외나 시험기간 간식 사업 등에 우리의 역량을 소모하지 않았어도 되었다.

 

  ‘이게 전망이 있나?’라는 의심도 있었지만, 사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나의 ‘운동’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홀로 이 운동을 지속해나가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우리 모임의 존재를 알려내고, 남들이 말하지 않는 공동체 내의 불편함을 공론화하고, 우리 모임의 목소리와 함께 해주는 이들을 확보해나가는 것만이 척박한 토양의 학교에서 생존해나가기 위한 최소조건이라고 판단했다.


  처음엔 이 길이 맞나 싶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니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멜로디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이쯤 되면 그만둬야지 싶을 때가 돼서야 신입이 들어왔다. 그 신입과 함께 또 다른 사업을 벌이고, 그 사업을 통해서 또 다른 신입이 들어오고, 그 과정을 몇 번을 반복하다보니 이젠 15명이 우리 모임과 함께하고 있다.

 

운동을 버리고, 학생회를 살려라

 

운동은 새로운 플랫폼을 찾고 학생회는 학생회 고유의 가치를 찾자


  앞의 많은 내용에서 본인은 학생회를 버려야 운동이 살아날 수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운동의 재생산을 위해서 학생회 수권이 필요하다던 지난 세월동안 이어져왔던 전술이 이미 실효했으며, 오히려 학생회 운영에 수반되는 달력사업으로 인해 우리 운동의 역량을 갉아먹고 있기에, 학생회라는 껍데기를 버리는 것이 우리 운동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반대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학생회’를 살리기 위해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말이다. 사실 답은 나왔다. ‘운동’을 버리면 학생회가 살아날 가능성이 크다.

 

  현재의 대학사회에서 흥행하고 있는 동아리나 소모임을 보면 대게 일치되고 있는 2가지 특징이 있다. 밴드부나 축구동아리처럼 ‘즐거움’이 있거나, 취업동아리나 브랜드 서포터즈처럼 ‘스펙’이 되는 공동체들은 이 척박한 상황에서도 흥행을 유지하고 있다. 학생회가 왜 즐거움이 사라지고 스펙이 되지 않았는지를 생각해보면 대게 학생회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운동적’ 색채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학생회가 운동적 정체성을 지우려는 시도 또는 감추려는 시도는 이미 다양한 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현재 많은 학생회도 이를 인지하고 수습 집행부 모집 공고나 홍보에 있어서 운동의 색채를 지우고 ‘선배와의 돈독한 관계’를 얘기하거나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놀기도 잘 논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수많은 학생회들이 스스로가 운동권이라는 점을 부인하거나, 실제 운동권이 아닌 이들이 학생회를 수권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수원대나 동국대의 사례처럼 학생회가 ‘어용’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이들이 ‘어용’에 가깝다는 본인의 주관적 판단은 차치하더라도, 분명 우리는 운동을 떠난 학생회 조직들이 ‘어용’으로 전락하진 않을까하는 걱정을 하고 있다.

 

  학생회가 운동을 버리고, 운동이 학생회를 버리라는 얘기가 곧 운동과 학생사회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학생사회와 학생회는 다르고, 학생회를 떠나도 운동은 계속되어야 하고, 학생회 조직들이 ‘어용’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바로 그 때가 운동을 필요로 하는 시기다. 실제 수원대의 경우 자생적으로 생겨난 ‘수원대학교 프리미디어’라는 자치언론이 지속적으로 학생회를 견제하다 올해 ‘수원대 권리회복 민주학생운동’이 출범하여 ‘총장 비리’를 비롯한 학내 사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마치며. 학생회를 버리고 광야로 나가자

 

  나는 2017년의 학생회가 이제 더 이상 운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학생회 수권이 핵심 활동가들에게 좋은 경력으로 남을 수는 있겠지만, 어디 운동이 ‘스펙 쌓기’던가... 운동을 지향하는 학생조직들이 지난 세월 ‘학생회 수권’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만큼 우리의 운동이 유의미한 성과를 얻었는지 궁금하다. 요즘 우리의 대학에서 운동적인 의제를 던지고 확산시키는 주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주체들이 학생회던가? 대부분의 학교에서 운동적 의제를 던지고 그 의제를 위해서 헌신하는 이들은 대게 학생회보다는 운동 조직, 학회, 내지는 소모임들이다. 여성주의 소모임들이 지난 몇 년간 대학 내 확산시킨 여성주의 의제를 보면 답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운동을 떠난 학생회는 위험할지도 모른다. 등록금심의나 공간, 복지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학교와의 충돌이 필수적인 상황에서 운동을 떠난 학생회가 제 역할 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제 역할도 잘 못하는 학생회는 학생대중의 판단에 따라서 재생산에 실패하여 도태되기 마련이다. 스스로가 운동권이라면 딱 한 가지만 기억하기를 바란다. 학생회를 버리고, 우리의 운동을 살리자. 학생회가 잘못 가고 있다면 우리의 목소리를 내자.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학생사회를, 우리와 함께 학교를 다니는 학우들을 믿자. 우리가 학생회와 함께하지 않아도 우리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져주는 학우들이 있을 것이고, 학생회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면 우리의 운동을 통해 학생회의 기조를 바꿔 낼수도 있다.

 

  학생회를 버리면 당장은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홍보비라는 명목으로 학생회비로 뽑아내던 포스터도, 아주 가끔 붙이는 대자보의 인쇄비용도, 24시간 우리의 보금자리로 자리매김하던 학생회실도, 수습집행부를 모집하면 꼬박꼬박 들어오던 새내기들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학생회를 버리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운동적 실천에 앞장설 수 있다. 박근혜가 싫으면 박근혜가 싫다고 대자보를 붙이고, 문재인의 정책이 싫으면 싫다고 성명서를 내고,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가고, 그 무엇이든 연예인을 초청하는 축제 업무에 치이는 것보다는 유의미한 실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운동과는 괴리된 집행부가 아니라 우리가 꿈꾸는 미래와 가치에 공감하고 함께하고자 하는 ‘동지’들이 만들어지고, 또 다시 그들과 유의미한 실천들이 가능해지진 않을까?

 

  우리 이제 운동을 떠난 학생회, 학생회를 떠난 운동권을 상상하자.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 우리의 학생회를, 우리의 운동을


by 미네노

  1. 달력사업: 새터, 등심위, 농활, 축제 등 학생회가 관례적으로 해야 하는 사업을 표현하는 은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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